정치분과 자료실

2010/03/09 (09:35) from 58.233.249.196' of 58.233.249.196' Article Number : 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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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민투표, 앞으론 말리지 말자

참으로 속상한 장면이었다. 지난주 청와대에서 열린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 환영오찬 때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헤드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파안의 웃음을 짓곤 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4개월 만에 단독사면을 감행했던 이 대통령, 사면되자마자 국민의 정직성을 문제 삼았던 이 회장이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 헤드테이블에서 그랬으니 그들이야말로 승리자였다.

그날 오찬은 두 사람을 위한 자리였다. 이 회장에겐 실질적 복권과 함께 재계 총수로의 군림을 선언하는 자리이고, 대통령에겐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일체화를 과시하는 자리였다. 공교롭게도 양쪽 테이블엔 여당과 제1야당 대표가 앉아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들은 두 사람의 승리를 공인하고 빛내주는 소품이었다. 스포츠 애국주의와 맹목적인 국운 상승 열광 속에서 모든 합리적 의문과 비판은 종적을 감췄다.

“국민들이 더 정직했으면 좋겠다” “현재 국민투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등의 발언은 아마도 이런 예감 속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이 국민 혹은 정치권을 조롱하고 또 겁박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건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고, 문제가 되어도 주워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면전에선 찬양 일색의 정치인, 언론·법조인, 고위 공무원만 널려 있는 이 회장에겐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의 잘못이라면 이런 권력자들을 전체 국민으로 착각한 것뿐이다. 이 대통령에겐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다. 국민투표를 대통령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 문제지만, 국민투표를 넣다 뺐다 하며 정치권과 국민을 겁주거나 겁줄 수 있다고 믿는 태도가 더 문제다. 재탕 삼탕의 의지를 그는 표명한 터이니, 벌써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정치권과 학계, 법조계는 명료한 법리적 근거,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가게 될 정치적 후유증 탓에 국민투표를 말렸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물틀레질을 그저 말리고 지켜보는 게 현명한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실효성 문제다. 헌법에 불합치하건 말건 불법이건 위법이건 하고자 하는 건 반드시 해왔던 게 이 정부다. 임기제 기관장을 마구잡이로 해고했고, 법원의 원상회복 판결을 무시했다. 무리하다는 내부 의견에도 교사 시국선언, 미네르바 사건, 피디수첩에 대한 처벌을 강행했다. 구미에 맞지 않는 판결에 대해선 사법부를 위협했다.

버릇 고치기 차원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국가 안위를 실제로 위협하는 일들이 너무 많이 벌어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은 국민과 자연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고, 되돌릴 수 없는 국토 유린의 문제다. 수천년간 생명과 문화의 젖줄인 4대강 오염은 이미 현실화됐고, 불가역적인 파괴는 강행되고 있다. 4대강만이 아니다. 가난해도 함께 살 수 있지만, 불신하면 함께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다. 대통령의 약속 파기 혹은 거짓말이 되풀이되다 보니 신뢰와 믿음은 발붙일 데가 없어졌다. 조삼모사를 비판하는 국회의원의 비판에 윤증현 장관은 공직자에게서 무슨 영혼을 기대하느냐고 되레 성을 내기도 했다. 세종시 입안자를 세종시 파괴의 앞줄에 세웠으니 신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따라 국론 분열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이젠 시민의 판단과 생각을 드러낼 때도 되었다. 그저 참고 가자는 건 무책임하다. 그 결과 다수가 찬성한다면 따르고, 다수가 반대하면 정책과 행태를 바꾸면 된다. 굳이 신임 연계 문제로 논란을 벌일 필요도 없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공약한 국민투표(중간평가)에 대해선 당시 위헌 여부로 논란을 빚진 않았다. 이젠 말리지 말자. 시민의 뜻을 드러내, 매듭 한번 짓고 나아가는 계기로 삼자.

  = 곽병찬 / 한겨레 편집인 chankb@hani.co.kr = (한겨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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