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분과 자료실

2011/06/23 (18:10) from 61.76.184.239' of 61.76.184.239' Article Number :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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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포퓰리즘 논란’의 사기극

‘보통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 사상, 활동’. 포퓰리즘에 대한 케임브리지 사전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반적 용례에선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뜻한다. 선동적 주장과 감성적 논리로 인민 주권의 회복을 공언하면서 피아, 선악 등 편 가르기와 흑백논리를 일삼는 대중 동원 정치라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뚜렷한 정의도 없고, 쓰는 사람이나 적용되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이 때문에 그저 나라 망치는 나쁜 정치로만 이해된다. 포퓰리즘의 원조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은 주요 기업 국유화, 노조 결성 전면 허용, 사회보장제 및 무상교육 전면 실시 등의 공약을 실천하는 등 인민의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 눈엣가시 같았던 서방세계는 그에게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을 찍어, 아르헨티나 경제 파탄의 책임을 지웠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곡물 및 육류 값 폭락과 서방세계의 아르헨티나 봉쇄였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대공황에서 미국을 건진 루스벨트 대통령도 포퓰리스트였다. 그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을 제압하기 위해 대중 동원 정치를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노변정담은 동원 정치의 한 유형이었다. 그가 노동3권 보장, 증세, 사회보장 확대 등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덕택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포퓰리스트라고 낙인찍지 않는다. 포퓰리즘이란 말은 그만큼 정치적이고 선동적이다.

최악의 선동성은 요즘 한국에서 구현되고 있다. 포퓰리즘의 상대어를 굳이 꼽으라면 관료주의나 엘리트주의다. 소수 정치인, 관료, 재벌, 족벌언론 부유층에 의한 정치다. 사실 한국에선 줄곧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의 정치가 이뤄져 왔다. 국민 혹은 시민의 정치를 표방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이들이 그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두 정권은 제한적이나마 정치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강조했고, 복지의 확대도 이뤄냈다.

이들이 두 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처음으로 동원한 것이 바로 포퓰리즘이었다. 예의 빨갱이 등 색깔론을 퍼부었지만 효과가 없자, 족벌언론을 중심으로 복지 확충, 시민의 정치 참여를 두고 포퓰리즘이라 낙인찍기 시작한 것이다. 기껏해야 진보적이란 수사가 붙을 법한 정책이었다. 국민의 감성에 대중 영합, 국력 파괴, 나쁜 정치의 낙인을 찍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포퓰리즘 공세가 요즘 기승을 부린다. 족벌언론은 물론 전경련까지 가세했다. 무상급식과 반값 등록금 문제가 주요 타깃이다. 수십, 수백배의 재원이 더 드는 초·중등 의무교육, 유치원 무상교육은 놔두고, 학생들에게 한 끼 같은 밥 먹이는 무상급식을 두고, 마치 나라가 거덜나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 떠는 미숙아 수준의 억지는 논외로 하자. 반값 등록금의 경우 한나라당이 처음 제기하고 공약으로 제시했을 때 족벌언론, 전경련 어느 누구도 포퓰리즘이라 비난하진 않았다. 학생과 시민사회가 들고일어나고, 정치권이 이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게 되자 비로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의 반값 아파트 공약에도 침묵했던 이들이다.

이걸 보면, 이들에게 포퓰리즘이란 자신의 정치적 반대세력과 시민사회의 요구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도 포퓰리즘이고, 투표는 더더욱 위험한 포퓰리즘이다. 이들의 용례에 따르면 친재벌 포퓰리즘(법인세 감면, 고환율 유지), 친부자 포퓰리즘(종합부동산세 및 재산세 감면, 집값 띄우기 정책), 친토건 포퓰리즘(4대강 사업, 경인운하)이라 할 수 있는 정책들은, 비록 나라의 곳간을 거덜내고 국토를 파괴하며 서민 가계를 위기에 몰아넣어도, 저희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아니다. 이들에게 포퓰리즘은 소수 엘리트의 엘리트에 의한 엘리트를 위한 정치가 실현되는 날 비로소 종식되는 셈이다. 어처구니없는 선동과 독선이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이런 말이 떠오르는 건 이 때문이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맞는지 말인지 모르나 그 결과는 어떠했던가. 이들의 혹세무민이 가소롭지만 두려운 이유다.

  = 곽병찬 / 한겨레 논설위원 chankb@hani.co.kr = (한겨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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