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분과 자료실

2011/09/30 (16:05) from 61.76.185.119' of 61.76.185.119' Article Number :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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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조선 과거제와 사회개혁

서평을 자주 쓰고 있기에 서평가란 직함으로도 불리지만 일이 아닌 증상으로 분류하자면 나는 책중독자에 속한다. 대개 이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우선 책을 사고 그 다음에 옷을 사 입으리라”고 한 에라스무스의 충고를 따르는 자들이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책을 사들여서 집안 곳곳에 쌓아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보다가 다시 꽂아두길 반복하는 게 그들의 주요 일과다. 예전에는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긁어모으는 귀족형 책중독자도 있었지만 재정을 고려해야 하는 ‘평민 책중독자’는 대개 특정 관심분야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몇 가지 주제의 책에 유독 탐을 낸다.

너무 읽을 게 많다는 이유로 젊은 시절에 일부러 제쳐놓았던 분야가 동양고전과 한국사 쪽이었는데, 인생 반고비를 넘기다 보니 더는 미루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오래 벼르다가 최근에 큰 마음을 먹고 구입한 것이 제임스 팔레의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이다. 원서가 1280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으로 국외 학자의 한국사 연구를 대표하는 업적 가운데 하나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유학자로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형원을 이 서양학자는 20년 넘게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유형원과 조선 후기’란 부제의 이 책이다. <반계수록>은 1670년에 완성되지만 생전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저자 사후 영조 때인 1770년에야 간행된다.

하지만 제임스 팔레는 <반계수록>을 독창적인 경세론과 제도개혁론을 펼친 대표작으로 간주하며 높이 평가한다. 그의 이러한 안목과 필생에 걸친 연구가 없었다면 유형원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팔레의 저작 때문에 <반계수록>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게 된 책중독자에게는 말이다.

벼르던 책을 손에 넣게 되면 잠시 어루만지다가 필요할 때 읽기 위해 고이 책장에 꽂아두는 게 보통 책중독자들이 하는 일이지만 간혹 일부를 읽어보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신분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펼쳐본 대목에서 저자는 조선의 과거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요컨대 국가는 거의 모든 범주의 양인이 과거를 치르고 관직에 등용될 수 있게 함으로써 조선 건국 이전이나 16세기 이후보다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더 확대시켰지만, 양반은 조상의 신분에 상관없이 양인들이 새로이 올라갈 수 있는 집단이 절대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사회개혁의 방향은 양반이 가진 세습적 특권을 약화시키고 좀더 개방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양반가문에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지위와 부, 그리고 권력과 권위를 보장받았고, 엘리트 코스의 훌륭한 교육을 받아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면 그 특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팔레의 스승인 애드워드 와그너의 연구에 따르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750개 가문 중에서 36개 가문이 전체 합격자의 53퍼센트를 배출했다. 과거제는 양반이 아닌 양인에게도 출세의 기회를 부여한 제도였지만 실제 결과는 그렇듯 일부 가문에 편중되었다. 이유가 없지 않다. 양인도 얼마든지 과거에 응시할 수는 있었지만 양반가문과 같은 경제력이 없었기에 책을 구입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이 공부했던 지방의 서당이나 향교는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사설 교육기관이나 가정교사에게 배우는 양반 자제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었다. 능력 본위의 인재 선발제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과거제는 양반가문의 존속에 오히려 기여했다. 결국 조선의 사회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이 조선의 패망과 무관하지 않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 이현우 서평가· 필명 ‘로쟈’mramor@empas.com (경향신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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